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모델 (문단 편집) === 최후 === 1945년 3월, B집단군은 [[루르 공업 지대]] 사수를 명령받았으나 레마겐의 철교를 탈취한 미군은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하고, 루르 포켓 작전을 성공시키며 완벽한 제공권을 활용해 루르 일대를 폭격했다. 모델은 포위망의 완성 전에 보유하고 있었던 전차로 역습을 가하여 미군 3기갑사단장을 전사시키는 등[* 전사한 미 3기갑사단장 모리스 로즈 소장은 3월 30일, 전투를 정찰하러 나섰다가 티거 전차들에게 그의 지프가 포위당했다. 이때 그가 항복하려고 권총을 내려놓는 것을 공격행위로 오인한 독일군 전차장에게 사살당했다.] 탈출구를 확보, 휘하 전 병력을 마르부르크 방면으로 탈출[*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는 회고록에서 이때 탈출 기회가 있었다며 B집단군을 묶어놓은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4월에 들어서면서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에 장악되어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대부분 격추당했기에 B집단군의 연료와 탄환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시키려 했으나 히틀러로부터 후퇴 불가, 현지 사수(Ruhrfestung) 명령만이 반복되면서 결국 루르에 전군이 고립되었다. 모델은 텔레타이프와 항공편을 통해 서부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과 히틀러에게 몇 차례나 후퇴 의사를 타전했지만 그때마다 거부되었고 4월엔 휘하 참모인 빈리히 베어(Winrich Behr) 소령[*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베어는 6군 사령부 소속이었는데, 6군이 포위당하자 파울루스의 명령을 받고 늑대굴에 출석해서 히틀러에게 전황을 직접 보고한 뒤 6군의 탈출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반격 작전이 성공하리라 믿었던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베어는 에르하르트 밀히 원수 휘하로 배치되었다.]과 귄터 라이히헬름(Günther Reichhelm) 대령을 포위망에서 탈출시켜 베를린의 총통사령부에 출석, 직접 [[히틀러]]에게 B집단군이 처한 상황을 보고하고 다시금 허가를 구했으나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 [[한스 크렙스|한스 크렙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포위망 안에서의 최고의 전우는 포위망 밖에서도 전우가 되어준다."''' >'''(Der beste K.I.K wird K.A.K)''' >---- >자신을 12군 참모장으로 임명한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모델의 곁에 남으려 했던 라이히헬름 대령과 마지막으로 저녁을 함께하며, 장교 식당 방명록에 모델이 적은 문장이다.[* 2002년, 귄터 라이히헬름(Günther Reichhelm)의 인터뷰] [[파일:attachment/600_Speer_Krebs_Reichhelm_Behr_Walter_Model.jpg]] ||3월 20일과 24일, 루르의 산업 시설을 포함한 히틀러의 파괴 명령을 거역하기 위해 슈페어는 알텐키르헨의 B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했고, 모델도 이에 동의했다. 왼쪽부터 귄터 라이히헬름, [[한스 크렙스]], [[알베르트 슈페어]], 폰 블로트니츠 대령, 발터 모델, 빈리히 베어|| [[네로 명령]], 즉 '''연합군의 손에 넘어갈 것을 대비해 루르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전해지나 모델은 제국 군수부 장관 슈페어와 처음부터 협력하며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전투 손실마저 최소화하여 독일 산업 지대의 7할을 차지하고 있었던 루르를 지켜냈다. 그런 그에게 미군의 [[매튜 B. 리지웨이]] 소장이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어 남북전쟁의 명장 [[로버트 리]]의 예를 들며 항복을 권고했다. 모델은 서한을 손에 든 채 참모장인 카를 바게너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역사의 빛 앞에서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일을 모두 한 걸까?" 바게너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모델은 이렇게 덧붙였다. >"패배한 사령관에게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난처한 침묵이 이어졌고 모델은 스스로 답했다. >"고대의 패장들은 독을 마셨다."[* 바게너는 미군 사절과 함께 리지웨이 소장을 찾아가 모델이 항복을 거절하는 내용을 구두로 전한 뒤, 자신은 그대로 남아서 항복했다. 이날 모델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주어진 임무 이상을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영광스러운 싸움 끝의 패배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한 뒤 참모진을 해산시켰다.] 같은 날인 4월 15일, [[국민돌격대]]라는 이름하에 훈련도 받지 못하고 총을 손에 든 유소년들과 노년층으로 구성된 부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부'''하고 >'''"귀관들은 의무를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 서류는 합법적인 것이니 만일 탈주병으로 체포[* 히틀러는 '국가반역죄' 및 '패배주의자'라는 죄목하에 고위 장성이라도 그 당사자와 가족에 대하여 즉결 처형이 가능하다는 명령을 내렸으며, 특별 재판부와 사형 집행 부대가 직접 이를 실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리하르트 폰 보트머 소장은 휘하의 장병들이 미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라인 강에서 본 방면으로 무사히 철수시켰다는 ‘죄목’으로 특별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되거나 미군의 포로가 되거든 제시하도록 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4월 17일 아침을 기점으로 B집단군의 해산은 명령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장병들에게는 3개의 선택지 - 1. 항복 2. 집이 가까운 자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사복 차림으로 귀가 3. 포위망을 탈출하여 중부 독일 방면의 아군과 합류 – 가 주어졌고, 장교나 노련한 부사관들이 병사들과 동행하여 마지막 임무를 수행했다.[* FMS B-593 Army Group B (22 Mar-17 Apr 1945). B집단군 해산 직전인 4월 15일 아침, 모델은 5기갑군 사령부에서 사령관 요제프 하르페 상급대장 및 참모장 폰 멜렌틴 소장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르페 장군은 부하들과 함께 미군에 항복했고 폰 멜렌틴은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포위망을 탈출, 소련군과 전투 중인 아군 부대로 향했으나 결국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날, 루르 전역의 모든 전투가 종결되었고 미군에 항복한 포로는 320,000명(국민돌격대 250,000명, 일반 장병 68,000명)에 가까웠다. 이후 모델은 탈출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만난 발터 막사이너 하사와 어린 병사들이 고위 장성과의 갑작스러운 대면에 놀라자 모델은 병사들의 이름, 고향, 군 경력을 일일이 물어보며 >"집으로 돌아가게. 우리들의 전쟁은 끝났어." 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귀로에 행운을 비네. 독일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달렸어.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훌륭한 청년이 되어 달라고 전해주게."''' 라고 말했다고 막사이너 하사는 기록했다. 적어도 이 순간의 모델 원수는 전선에서 직접 장병들을 지휘하고, 독려하던 평소의 모습을 회복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